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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조작하는 지식인들

by Adriatico 2011. 12. 18.




'진리'를 조작하는 지식인들

피에르 부르디외 | 사회학자 i

  

아직도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여기는 지식 활동가들이 이번에는 소외’, ‘소수자’, ‘정체성’, ‘다문화주의란 애매한 용어들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모든 담론에서 미국식 수사법을 그대로 동원해 세상을 분석하려 든다. ‘세계화도 이들의 수사법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지식인인가?

선진국의 경영자, 외교 담당 고위 공무원, 미디어에 능한 지식인, 높은 지위의 언론인들이 하나같이 희한한 노블랑그’(novlangue)를 말하기 시작했다. 노블랑그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조어로, 지식인들이 애매한 표현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블랑그가 대상으로 하는 어휘는 모두 사람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는 세계화’, ‘유연성’, ‘관할권’, ‘채용 가능성’, ‘하위 계급’, ‘소외’, ‘신경제’, ‘톨레랑스 제로’, ‘공동체’, ‘다문화주의’, ‘포스트모던’, ‘민족성’, ‘소수자’, ‘정체성’, ‘세분화등이다.

이처럼 퍼져나가는 노블랑그는 상징적인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노블랑그는 신자유주의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연구가, 작가, 예술가 등 문화 생산자들과 좌파 활동가들도 전파하고 있기에 그 영향력이 더욱 강력하고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은 세계화란 명분을 내세우며 100년간의 사회투쟁 결과로 얻게 된 사회·경제적인 성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세상을 다시 구성하려 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낡은 부산물, 새로운 질서를 훼방하는 성가신 것들로 묘사한다. 반면에 좌파 활동가들은 대부분 자신을 늘 진보주의자라고 믿는다.

 

노블랑그’, 상징 제국주의 산물

인종 혹은 민족을 지배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문화제국주의는 상징적인 폭력이다. 개별적인 특성을 모두 억지스럽게 하나로 보편화해놓고 복종을 강요하는 구속적인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폭력인 셈이다. 19세기에는 많은 철학 문제가 독일 대학교수들 사이의 이견에서 나와 마치 보편적인 철학 문제인 것처럼 전 유럽으로 퍼졌다면, 지금은 많은 토론 문제가 미국 사회와 미국 대학들 사이의 이견에서 나와 보편적인 문제인 것처럼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미국식 노블랑그는 강력한 설득력을 내세우며 베를린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런던에서 리스본으로 퍼져간다. 이런 노블랑그는 나름대로 중립적인 사상을 가진 거대 국제기구들, 즉 세계은행, 유럽의회, 경제협력개발기구,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집단이라 불리는 뉴욕 맨해튼 연구소, 런던 애덤스미스 연구소, 프랑크푸르트 도이체방크재단, 파리의 생시몽재단, 그리고 자선단체들과 권력을 가진 학교들(프랑스 시앙스포,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 미국 하버드 정치학대학 등), 성급한 논설가들과 문화 수출입에 열성적인 전문가들에게 극도의 현대화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거대 미디어들 덕분에 열심히 여기저기에 전파된다.

이처럼 미국식의 상투적인 노블랑그는 원래의 의미는 숨긴 채 교묘한 논리로 사상이 전세계에 전해지고, 정의가 미리 정해지고, 결론은 현학적이다. 그리하여 논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제와 개념의 원래적 의미가 교묘하게 상실되고 그럴듯하게 포장된다. 가령 자유시장의 효율성, 문화 정체성의 필요성, 개인의 책임성 등의 강조가 때와 장소에 따라 철학적·사회적·경제적 혹은 정치적인 옷을 입게 된다.

미국의 노블랑그는 지리적으로 전세계에 퍼져나가 세계화를 이루고, 동시에 개별적인 특수성을 제거한다. 나아가 반복되는 미디어의 힘을 빌려 마치 보편적으로 모두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방향인 것처럼 변하게 된다. 그 결과 미국의 노블랑그를 전하는 사람들도 사회마다 역사적으로 특수한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복잡한 현실을 포스트 포드 시대’, ‘포스트 케인스 시대의 미국 사회라는 모델로 단순화한다.

세계 유일의 막강한 파워, 지구상의 상징적인 메카인 미국의 노블랑그에서는 사회복지 국가가 붕괴되고, 대신 형벌에 의존하는 국가가 강해지고, 노조운동이 억압을 받고, 오직 가치-주주만을 기반으로 한 기업의 개념이 독재처럼 횡포를 부리게 되며,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사회의 불안감도 커지는 상황을 경제성장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마찬가지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토론도 모호하고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이루어진다. 유럽에서 도입한 다문화주의란 용어는 원래 시민의 문화 다원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문화주의하면 계속되는 흑인의 소외,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는 아메리칸드림 신화의 위기(대신 경제적인 위기가 공교육 시스템에도 영향을 끼쳐 문화 자산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사회계층의 불평등이 심각해진다)를 이야기할 때 사용된다. 이처럼 다문화주의적이란 형용사는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를 감추며 단순히 대학 문제와 인종 문제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소외된 문화를 인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개념도 이론도 사회적 혹은 정치적 운동도 아니다. 오히려 교육과 직업에서 계층을 나눈다.

다문화주의는 미국의 사상에서 악덕 3가지라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 첫째는 집단주의, 둘째는 포퓰리즘, 셋째는 도덕주의다. 집단주의는 사회 분열을 고착화하고, 포퓰리즘은 지배 구조와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관점을 찬양하며 인기에 영합한다. 도덕주의는 사회와 경제계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방해가 되며, 정체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제로 결론도 없는 토론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일상의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문화적 인정을 현학적으로 다루며 자기만족에 빠지지만, 일상에서는 사람들이 다른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가령 비주류 계층과 비주류 인종 출신인 수천 명의 아이들이 자리가 없어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로스앤젤레스만 해도 올해 이런 학생이 25천 명이다). 가계 연간 수입이 15천 달러 미만인 젊은이들의 경우 10명 중 1명만이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생활을 즐기지만, 가계 연간 수입이 10만 달러 이상인 젊은이들의 경우 94%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문제다.

  

세계화의 야만성 교묘히 포장

세계화라는 개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화에 이용된다. 가령 세계화는 미국의 제국주의로 인해 나타난 결과를 문화 통합 내지 경제적인 운명으로 포장하며 국가 간 힘의 관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교묘히 속인다. 보수적인 두뇌집단과 이에 동참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도움으로 신자유주의 사상이 20년 전부터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미국식 노사관계와 문화정책이 선진국으로 퍼져나간다.

그 결과 공공재는 상품으로 전락했고 월급쟁이의 위치가 불안정해진다. 그럼에도 이를 국가가 발전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게 문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과정을 분석해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정부들이 금융시장에 자발적으로 맞춰가는 게 당연하다며 내세우는 미사여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외무역이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복지정책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내부 정치의 결정 때문에 불평등이 늘어나고 복지정책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도 사회구조를 미국식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하면서 세상을 자국처럼 만들어간다. 이는 결국 정신적인 식민지화를 부르게 된다. 실제로 요즘 경제·경영 교육이 미국식을 보편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지구상의 성서처럼 미국의 원칙이 선진국 사회를 변모시키고 있다. ,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고 공권력과 사법이 강화되며, 자본이 규제 없이 자유롭게 흐르고 고용시장이 유연화되며, 사회보장이 축소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다른 선진국 사회들이 변하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개념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획일화에 이용된다. 가령 세계화는 미국의 제국주의로 인해 나타난 결과를 문화 통합 내지 경제적인 운명으로 포장하며 국가 간 힘의 관계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며 교묘히 속인다. 보수적인 두뇌집단과 이에 동참하는 정치권과 언론의 도움으로 신자유주의 사상이 20년 전부터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미국식 노사관계와 문화정책이 선진국으로 퍼져나간다.

그 결과 공공재는 상품으로 전락했고 월급쟁이의 위치가 불안정해진다. 그럼에도 이를 국가가 발전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게 문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경제가 발전한 과정을 분석해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정부들이 금융시장에 자발적으로 맞춰가는 게 당연하다며 내세우는 미사여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외무역이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복지정책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내부 정치의 결정 때문에 불평등이 늘어나고 복지정책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도 사회구조를 미국식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하면서 세상을 자국처럼 만들어간다. 이는 결국 정신적인 식민지화를 부르게 된다. 실제로 요즘 경제·경영 교육이 미국식을 보편적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지구상의 성서처럼 미국의 원칙이 선진국 사회를 변모시키고 있다. ,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고 공권력과 사법이 강화되며, 자본이 규제 없이 자유롭게 흐르고 고용시장이 유연화되며, 사회보장이 축소되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다른 선진국 사회들이 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제국주의 성향을 띠게 된 건 정부 부처, 두뇌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현학적인 언어로 현혹한 지식층과 대학의 책임이 크다. 영국의 예를 통해 제국주의적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파고드는지 알 수 있다. 영국은 역사·문화·언어적인 이유로 미국과 유럽을 중재하는 구실을 한다. 특히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자칭 3의 길의 이론가라고 하는 앤서니 기든스 교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로 팀을 이뤄 세계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지금의 가난한 자와 부자는 예전의 가난한 자와 부자와는 다르며 기존 사회보장제도와 정부 구조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두 사람은 경제정책과 사회보장정책은 서로 연관이 있기에 사회보장비를 지출하려면 경제 전반에 어떤 영향이 끼치는지 먼저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학자들은 이제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다. 토니 블레어와 앤서니 기든스 같은 팽글로스’(볼테르의 <캉디드>에 등장하는 낙천주의자)를 찾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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