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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Adriatico 2011. 12. 18.





지식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자크 부브레스 | 언어철학자


정당의 이념적 동반자
, 비판적 사상가, 전문가, TV토론의 대가, 정권의 자문역지식인의 세계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참여 모델이 난무하고 있다. 현대 지식인 사회의 무대를 지배하는 자들은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해방의 문제를 회피한다.

최근 우리 지식인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프루스트가 살아 있다면 또다시 무엇인가 변했다”(1)라고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지성계가 오래전부터 정체의 과정, 심지어 쇠락에 들어섰다는 지적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이미 우리 대부분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학자인 피에르 노라(2)는 페리 앤더슨(3)이 개진한 현 시대 프랑스 지식인계의 지적 빈곤에 대해서 반대할 아무런 근거를 찾지 못한 채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은 바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지적 창조성에서 무기력과 쇠약을 보인다는 그의 총체적 진단에 공감한다. 다만, 그가 우리 사회의 추락이라고 칭한 현상을 비웃기보다는 고통스럽게 바라볼 뿐이고 재난이라는 용어를 변신이라는 더욱 고백 가능한 언어로 가리고 싶을 뿐이다.”(4)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이보다 더욱 심각한 사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식인들이 과거 찬란했던 선배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언론과 유착해 신반동주의적인 시각을 서슴지 않고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다는 점을 최근 지식인계의 주요한 변화라고 문화·교양 잡지가 소개할 때, 우리는 이를 재난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조금 부드럽게 표현해서 변신으로 봐야 할까? 더 나아가서 수십 년간 진보가 지성계를 지배한 이후, 변두리의 이민자 집단 거주지에 대해서 진실을 밝힌다는 명분 아래 집권 여당의 일탈한 강경 조처를 지지하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신우파 지식인들의 출현(5)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이를 지식사회의 재난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한 변신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레이몽 아롱, 미셀 푸코, 페르낭 브로델, 기 드보르, 질 들뢰즈, 장프랑소아 리오타르,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자크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지성계를 빛냈던 인물들이 이승을 떠난 것을 확인한 페리 앤더슨은 현재 어떤 프랑스 지식인도 이들에 비견할 만한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베르나르앙리 레비(6)와 같은 지식인들이 현재 과도하게 얻고 있는 명성을 감안해보면, 이제 프랑스 지성계의 수준이 어디까지 내려와 있는지 명확히 가늠할 수 있다.

하나의 사실 혹은 하나의 개념까지도 정확히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수없이 많음에도, 이 엄청난 멍청이에게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부여하는 관심을 보면, 취향과 지적 수준에서 우리 사회의 규범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점을 상상하기 힘들다. 희극 같은 이런 현실이 현재 다른 문명사회에 존재하기나 할까?”라고 페리 앤더슨은 개탄스런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도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를 또다시 표명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오스트리아 출신 풍자작가 칼 크라우스(7)언론이 만들어낸 유명세와 저명 인사들에만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작품인 “<자질 없는 남자>의 주인공 아른하임보다 더욱 기가 막힌 방식으로 문화와 경제, 영혼과 사업의 위대한 통합을 몸소 실현한 전지전능한 천재를 갖게 된 사실에 행복해하자!”라는 그의 반어법적 외침은 회의론에 갇힌 채 학문과 과학을 대변하는 학자들의 침묵과 대비된다.

 

진정성 없는 미디어 지식인

또다시 두 언론사 기자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한 <프랑스식 사기>(8)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이 사기의 주된 책임자, 심지어 거의 독점적인 행위자인 언론권력의 대표자들이 오히려 사기를 폭로하는 모습을 보면 아나톨 프랑스의 가상 패러디 소설 <팽귄섬>에 사는 오브뉘빌 교수가 현존하는 최고의 민주주의를 찾는답시고 뉴아틀란티스에 갔다가 귀환할 때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 나온 섬 주민들에게 그곳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시스템을 친절히 설명하는 장면이 상상된다.(9) 이 일화에서 나는 그가 스스로 고민하는 문제의 핵심을 이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는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세간의 판단을 용인하지 않고, 또 만약 이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더라도 그는 이로 인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오브뉘빌 박사는 작금의 찬란한 시대에 부합되는 학자 타입이다. 그는 오늘날 모두가 자본주의의 미덕에 대해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기가 막힌 추잡함이다!”(10)라고 1990년에 외친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과는 다른 종류의 학자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식인들은 퍼트넘처럼 순진하지 않으며 이 사안과 관련해서 아무런 심리적 갈등도 못 느끼는 뻔뻔함을 보여준다. 고용 불안에 맞선 청년들의 시위에서도 지식인들은 시장과 자본의 권력을 비롯해 모든 기존 권력을 존중한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들은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을 쏟아낸다. 그러나 사회 정의와 사회문제 앞에서 눈귀를 막으며 귀찮아한다. 그들은 대자본을 상대로는 말을 아끼지만 사회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기꺼이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부 사상가의 저작에 언론이 주기적으로 쏟아내는 과도한 찬사 속에 진정함이 얼마만큼 배여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론의) 이러한 경배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그 근저에는 오늘날 진정으로 경배할 만한 인물이 더 이상 없다는 일반적인 확신이 숨어 있다. 언론이 입을 열 때, 그것이 진정성 때문인지 아니면 하품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 오늘날 한 인물을 천재라고 칭하고 여기에 덧붙여서 그 인물 말고는 이제 더 이상 천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숭배 혹은 모든 실제의 감정이 결핍되어 단지 구경거리로 전락한 히스테릭한 사랑을 연상시킨다”(11)고 로베르트 무질은 예전에 이미 갈파했다.

불행하게도 프랑스에서는 이 상황에 하나의 어려움이 더 추가된다. 이것은 과거 구조주의가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도 분명하게 있었으며 놀라울 정도로 위축된 비평의 위상이라고 페리 앤더슨이 칭한 것이기도 하다. “<라캥젠 리테레르> <르누벨 옵세르바퇴르> <르몽드 데리브르>와 같은 매체의 서평에 실리는 대부분의 글 뒤에 흐르는 것은 오직 홍보에 대한 생각뿐이다. 소설, 수필 혹은 역사책에 대한 진지하고 타당하며 솔직담백한 비평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고 앤더슨은 확언한다. 결국 모든 사기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사기는 비평 감각, 거리 두기, 비평 의지가 결여된 작금의 비평 행태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가 염려한 바대로 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피에르 노라는 앤더슨에게 아무런 대답도 못한다. 아니 그는 이 문제 자체를 거론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언론이 현재의 비평계 상황을 최선이라고 믿으면서 이곳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핑계를 습관적으로 붙이면서 기존 행태를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내세우는 2개의 허위적 단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구태여 논박하지 않겠다.


전향자의 모순된 자기변명

현재의 지배적인 지적 분위기에서 지식사회는 이제 좌파임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물론 혁명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됐다) 심지어 진보민주주의까지 포기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일까?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우려스럽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철학은 민주주의와 예외적으로 매우 늦게 화해했으며, 이후 짧은 기간만 민주주의를 옹호하였다(우리는 이를 신참자의 열성으로 칭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민주주의를 다시 외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자크 랑시에르는 주저 없이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민주적이라고 칭하는 사회와 국가에서 지배적인 지식인 계급이 자신의 상황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는데도, 그리고 다른 체제하에서 살기를 진정 원하지도 않으면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민주주의라 불리는 유일한 해악에 돌리는 실상”(12)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문한다. 민주주의에다 이러한 종류의 비난을 퍼붓는 지식인들 중에서 그들이 결국 비난하는 대상이 민주주의 자체임을 인정하는 자들이 드물다는 점은 자명하다.

어떤 측면에서 이들이 민주주의의 가장 확신에 찬 지지자들일 수도 있다. 미국이 민주국가의 가치·원칙·안전을 옹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킬 때 이들은 미국의 행동을 거리낌 없이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 지식인들이 불평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부와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명이며 국민이고 또 국민들의 관습이다. 이들의 반민주적 감정은 랑시에르를 따르자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민주주의 문명이라는 재난을 억압하는 민주주의만이 좋은 민주주의다.”

이 지식인들의 모든 논의에서 사회 현실,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의 이슈는 거의 잊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문제들은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간주하던 젊은 청년들,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미래상(더욱 정확히 말하면 미래상의 부재) 앞에 무기력해진 바로 그 청년들의 시위와 같은 다소간 거친 방식으로 이들 지식인의 망각을 주기적으로 일깨운다. 사회적 빈곤에 대한 저항의 정당한 방식으로 이들의 바로 전 선배들이 이해하고 동조할 만한 사안에 대해서 신지식인은 일반적으로 침묵한다. 간혹 그들의 신반동적사고는 청년들의 집단저항에서 자유방임의 폐해, 혹은 민주사회의 병폐의 징후를 읽고 정치 지도자들의 우유부단한 리더십을 나무랄 때 드러난다. 크라우스는 지식인들에 대한 회의감을 이렇게 표명했다. “오늘날 지식인들의 판단력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근본적인 회의로 인해 나는 이들 각자가 받드는 이상의 수준에 맞춰 그들 앞에 나의 몸을 낮출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13)

이들이 다양한 이상’(사상, ‘진정한문화, 공화주의적 보편성, 초월 등)을 내세워 악화일로의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 앞에서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방식을 은폐하는 작태에 대한 내 반응은, 치욕스러운 방식으로 정치 스캔들을 옹호했던 한 저명한 지식인에 대해 과거 크라우스가 보인 앞의 반응과 거의 동일할 것이다. 이러한 반응에 반지성주의딱지를 붙이는 것은 진지한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지성 사회, 특히 가장 특권적인 지위를 대표하는 지성계를 거부할 만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반대로 보통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해와 관용의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인 까닭이다.


보통 사람 이상의 규범 필요

오웰의 전기작가인 버나드 크릭은 오웰이 불의와 불관용 때문에 분노를 표현할 때, 한 번도 평범한 보통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지식인들을 향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권력을 잡거나 권력에 영향을 미쳤으며 따라서 결과에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14)고 설명한다. 이것은 부르디외와 크라우스의 태도이기도 했다. 책임감과 자신의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지식인이 이 상황에서 어떤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오웰은 영국 지식인들의 행태에 대해서 자유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바로 자유주의자들이며 이들은 사상에 대해 추잡한 작태를 보여주는 지식인들”(15)이라고 혹평했다. 두 번째 논점에 대해서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랑시에르는 르낭이 <지적·도덕적 개혁>에서 표명했던 논거를 상기시킨다. “보편 선거 때문에 프랑스는 완전히 속물로 변해버렸다. 과거 프랑스를 걱정했던 귀족들, 애국주의, 미에 대한 열정, 영광에 대한 열망은 프랑스의 영혼을 대표했던 귀족계급과 함께 사라졌다.”(16) 과거 르낭과 같은 지식인들은 보편 선거를 비난하면서 과학의 필요성, 그리고 귀족과 학자의 우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나는 이런 표현이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르낭과 같은 일관성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또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밝히지도 않은 채, ‘우리 사회의 영혼을 대표한다는 강한 확신 아래 그와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행태에서 어떤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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